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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항암제부터 면역항암제까지 기적의 신약 개발을 향해
20세기 들어 의학과 공중보건의 발전 속에 지구촌 전반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며 암 발생률도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암 연구가 주로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기초과학과 사뭇 다른 경로를 밟으며 발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살리는 게 급선무인 만큼 발생 기작에 대한 이해에 앞서 치료법부터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모험적인 절제술과 약물 투여, 방사선 치료 등의 임상효과를 바탕으로 한 발 한 발 암 연구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인류 난제 해결을 향한 모험
인류 난제 해결을 향한 모험
기적적으로 회복한 암 환자와 치료 부작용 등에 의지해 조금씩 지식을 축적해가던 암 연구는 1940년대 ‘항암제’의 개발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미국 예일대와 하버드 의대 연구진이 제안한 화학요법을 바탕으로 1949년 최초의 항암제인 메클로에타민이 태어났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등장한 세포독성 항암제는 수술, 방사선 치료와 병행되며 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단점도 분명했습니다. 빠른 암세포 증식과 전이를 막는 데 집중하다 보니 조혈모세포, 점막, 모발 같은 정상세포와 면역세포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암세포만을 정밀 타격하는 ‘표적항암제’의 개념이 대두됩니다. 그리고 밀레니엄의 첫 해인 2000년, 마법의 탄환으로 불리는 글리벡(Gleevec)이 탄생했습니다. 정상세포와 달리 암세포에만 있는 특정 분자 표적을 판별해 공격하는 글리벡은 만성골수성백혈병에 큰 치료효과를 나타냈습니다. 글리벡의 대성공은 곧 전 세계적인 신약 개발 열기를 불러일으켰고 더욱 다양한 표적항암제들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환자의 95%에서 동일한 돌연변이 유전자가 발견되는 혈액암과 달리 폐암, 대장암 같은 한층 복잡한 양상의 고형암에는 효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항암제에 내성을 보이는 암세포들의 출현도 한계였습니다.
화학연의 항암제 개발도 이런 내성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습니다. 1990년대 우리나라는 급격히 늘고 있던 암 환자들의 5년 상대 생존율이 4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또 글로벌 제약사들이 개발한 항암제는 한 달 약값만 수백만 원에 달해 일반 서민들이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약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가 어려웠던 암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암세포 확보부터 시작한 항암제 연구
이에 따라 화학연 연구진은 앞서 항생제, 심혈관 치료제, 바이러스 질환 치료제 등을 연구하며 축적해온 신약 개발 경험을 기반으로 약제 내성을 억제하는 신규 항암제 연구를 본격화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약 개발 과정이 그러하듯 이 역시 출발부터 큰 난관이었습니다. 연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항암제 내성을 가진 종양 세포주의 확보부터가 큰일이었습니다.
해외 연구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분양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 화학연 연구진은 국내 대형병원이 종양세포와 내성 종양세포를 분리·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필요한 암 조직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내성 세포주 확보에 성공한 화학연 연구진은 곧 국내 최초의 항암제 신약인 백금착물 항암제 ‘썬플라’의 약효평가를 통해 무시 못 할 저력을 대내외에 과시합니다.
연구과제 중단 등의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우직하게 이어졌던 화학연의 항암제 연구는 2000년대 들어 약물 개발 경험이 있는 의약화학 전공 연구원들의 합류로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암세포의 무한 증식을 막는 억제제와 경구용 투여가 가능한 화합물 등 약 800종 이상의 유도체를 합성한 연구진은 이 가운데 다수의 신규 항암제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 국내 제약사 중 항암제 시장점유율 1위인 보령제약에 기술이 이전된 신규 혈액암 치료제 후보물질 ‘PI3K 감마·델타 및 DNA-PK 저해제’입니다.
항암제 연구에서 중요한 건 세포 내 신호전달 물질로 암세포 증식과 전이에 관여하는 특정 단백질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키나아제 또는 인산화효소라 불리는 이 단백질은 최근까지 알려진 것만 약 500종 이상이 넘는데요. 이계형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은 이 가운데 특히 혈액암을 유발하는 PI3K 감마와 PI3K 델타, DNA-PK의 삼중 저해제입니다. 이 새로운 항암제 후보물질은 혈액암 세포주의 성장 억제 효과가 크고 체내에서 약이 흡수, 작용, 배출되는 약동력학 면에서 기존 치료제들보다 효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지난해 12월 미국혈액학회에서 공개된 임상 결과에서는 악성림프종 환자 1명에게서 암세포가 모두 사라지는 ‘완전관해’까지 확인되며 새로운 혈액암 치료제 탄생의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한 번 물꼬가 트인 화학연의 항암제 연구는 계속해서 세계적인 신약 후보물질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광호 박사팀은 세계 최초로 4세대 폐암 치료제 ‘BBT-176’를 개발해 2018년 국내 바이오 벤처기업인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에 기술을 이전합니다. 기존의 억제제마저도 잘 듣지 않는 폐암 세포의 특정 유전자 혹은 단백질만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이 새로운 항암제 후보물질은 화학연의 세계적 혁신 기술로도 선정됐는데요. 현재 미국 임상 연구에서 약물의 안전성과 약효가 확인되어 보다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 2상 연구가 준비 중입니다.
이듬해인 2019년에는 이혁 박사팀이 개발한 대장암 표적 치료제 선도물질이 세계 최대 바이오 전문 투자사인 오비메드, 다국적 제약기업 존슨앤존슨,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가 함께 설립한 퓨처엑스(FutuRx)에 기술 이전되며 국내외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혁 박사팀이 타깃으로 삼은 특정 단백질은 ‘티닉’(TNIK)입니다. 대장 세포에 많이 분포하는 키나아제의 한 종류로 베타카테닌 단백질과 결합해 대장암 성장과 증식, 전이를 촉진시키는 단백질이지요. 이에 따라 화학연 연구진은 약 10여 년에 걸쳐 수많은 화합물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티닉 단백질이 세포 내 유전물질에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억제하는 새로운 대장암 표적 치료제 후보물질을 개발해냈습니다.
다양한 암을 더 정확하게
이와 함께 표적항암제들이 암을 유발하는 단백질의 특정 부위에 결합해야만 약효를 발휘하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 개발에서도 화학연의 발전은 거듭됩니다. 황종연 박사팀은 그간 결합 부위에 상관없이 다양한 표적에 적용되는 단백질 분해 신약 개발 플랫폼(Targeted Protein Degradation, TPD)을 구축해왔는데요. 이 기술은 우리 몸에 존재하는 단백질 분해 시스템을 이용하여 질병을 유발하는 나쁜 단백질을 분해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 단백질 분해 기술 중 하나인 프로탁(PROTAC) 약물과 분자접착제 후보물질을 개발해 국내 제약사에 각각 기술이전 했습니다.
한편 현재 세계 항암제 연구의 트렌드는 대사 항암제, 항암 바이러스 치료제, 면역 항암제 등 새로운 원리의 차세대 항암제 기술들로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사람 고유의 면역 체계를 이용하는 면역항암제가 기존 암 치료법에 새로운 활력을 더하고 있는데요.
화학연 역시 면역 항암제 분야에서 이창훈 박사팀이 기존보다 2배 이상 암세포 사멸 효과가 뛰어난 NK세포 치료제, 박지훈 박사팀이 피부암 중 하나인 흑색종에서 많이 발현되는 단백질을 인식해 항암 작용을 하는 CAR-T 치료제 등을 개발해 바이오기업에 이전하며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정상 면역세포를 포섭해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나쁜 세포가 아닌 척 위장하는 데 능숙한 암세포를 보다 정확히 식별하고 제거하기 위해 우리 몸의 고유 면역체계인 NK세포(Natural Killer cell)와 환자의 혈액 속 T세포를 추출해 CAR-T 세포로 만들어 다시 주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암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화학연은 혈액암에서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 면역항암제를 대장암, 폐암, 간암 등 여러 암종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저분자 기반의 후보물질 적용 기술을 개발하는 등 차세대 항암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인류의 난제 암 정복을 향한 화학연의 바쁜 발걸음이 하루 속히 더 많은 암 환자와 가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범용기술로 구현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