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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Special

화학이 이끄는 유병장수 시대

작성자하이브파트너스  조회수2,975 등록일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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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CT 나르샤

화학이 이끄는 유병장수 시대

 

2026년 대한민국은 전체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합니다. 전남·전북·경북·강원·부산 등의 지자체는 이미 한발 앞서 초고령 사회에 들어섰습니다. 우리나라는 최저의 출산율까지 더해져 203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에서 노령화 지수가 가장 높은 ‘노인대국’에 오를 것도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장수가 사회적 부담이 아닌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노년까지 건강하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3.5년입니다. 반면 건강수명은 66.3년에 그치고 있습니다. 질병과 부상으로 고통받는 유병 기간이 17.2년이나 되는 것이지요. 이 가운데 노인에게 신체적·정신적·경제적으로 가장 큰 부담을 지우는 질환이 다름 아닌 한국인의 첫 번째 사망원인 ‘암’입니다. 최근의 암보험 광고가 과거라면 금기어였을 ‘유병장수’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노출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만성 난치질환인 암이 노화와 뚜렷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첨단 의약학을 견인하며 인간 평균수명 연장에 기여해온 화학에 ‘건강수명’의 또 다른 기대를 더하게 되는 시기, 우리나라 유일의 화학 분야 국책연구기관으로 국민 건강과 행복 증진에 앞장서 온 한국화학연구원의 암 치료제 연구개발 현황을 소개합니다.

 

 

 

 

 

KRICT 나르샤

암 이해를 향한 인류의 여정

 

2월 4일은 국제암예방연합이 지정한 ‘세계 암의 날(World Cancer Day)’입니다. 앞서 2월 2일은 간암의 날, 곧바로 대장암의 날(3.31)도 다가옵니다. 난소암의 날(5.8), 신장암의 날(6.18), 폐암의 날(8.1), 유방암의 날(10.19), 췌장암의 날(11.16)까지 암과 관련한 기념일은 연중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의 예방과 치료는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 모두의 숙제이자 오랜 숙명이기도 합니다.

 

노화와 암의 역학관계

지난 9월 우리나라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국내 사망자의 26%가 암으로 사망합니다. 특히 신체의 노화 현상이 빨라지는 40대 이후부터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뚜렷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 10년간 조기 검진과 치료 기술의 발전으로 생존율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는 인구 10만 명당 142.8명에서 161.1명으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증가하는 암 발병률과 사망률은 해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미국 워싱턴대 연구팀이 세계의 질병·상해·위험요인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 세계 암 사망자 수는 2010년 829만 명에서 2019년 1,000만 명으로 21% 가량 증가했습니다. 발병률도 높아졌습니다. 2010년 조사에서는 한 해 1,900만 명의 신규 암 환자가 생겨났지만 최근 조사에서는 2,300만 명으로 집계되었지요. 10년간 26%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의 의사이자 종양학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2011년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The Emperor of All Maladies: A Biography of Cancer)>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자신의 연구 분야인 암의 역사를 정리한 책으로 발간 즉시 수많은 화제를 낳으며 그해 퓰리처상까지 수상하게 되는데요.

오랜 세월 암이 인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며, 또 그 변화무쌍한 형태와 이해하기 힘든 양상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는지를 설명하는 저자는 “인간의 수명 연장이 암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다”라며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생전에 이 불멸의 질병과 맞닥뜨릴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마주칠 것인가”라고도 말합니다. 노화와 암 발생의 인과관계는 아직 정확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평균 수명이 늘면서 암을 이기고 건강하게 장수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 껍질과 바위의 공통점

암에 대한 인류의 지식은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이집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화 ‘미이라’에서 악인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건축과 천문학 등에 두루 능통한 학자이자 대제사장, 그리고 이집트 고왕조 최초의 재상이라고도 하는 이모텝(Imhotep)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남긴 기록이지요. 뛰어난 외과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여러 가지 신체 부위의 질환을 생생히 묘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유방암’이었습니다. 이모텝은 이 불룩하고, 단단하고, 치밀하고, 크게 번지는 덩어리를 자신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라고 투지를 불태웠지만 치료법으로는 끝내 “없음”이라는 한 문장밖에 적을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좀 더 다양한 종류의 암을 기록하고 이 질병에 ‘게’라는 뜻의 카르키노스(karkinos)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둘투둘하고 단단한 암의 모습과 옆으로 잘 번지는 성질을 게(crab)에 빗댄 것이지요. 이 단어가 오늘날 암을 지칭하는 영어 캔서(cancer)의 어원이 되는데요. 히포크라테스는 나쁜 피를 뽑거나 여러 가지 채소로 만든 해독제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치료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암 환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해독제는 현재도 ‘히포크라테스 수프’라 불리며 암 환자들의 치료식으로 애용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300년경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인 황제내경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한자어 암(癌)은 바위 암(岩)에서 비롯된 글자입니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바위처럼 딱딱한 덩어리에 ‘병들어 기대다’란 부수를 더해 사용하다가 근대의학이 도입되며 종양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착한 것이지요.

 

살아 있는 세포가 있다면 어디라도

암은 중생대 공룡과 고인류 네안데르탈인에게서도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랜 질병입니다. 하지만 세인들의 이해가 높아진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질환은 대부분 감기, 결핵 등의 감염병이었습니다.

1850년대 중반까지도 실체가 분명하지 않던 암을 과학의 영역으로 이끌어낸 사람은 세포병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인 의학자 루돌프 피르호입니다. ‘세포의 이상이 신체를 병들게 한다’는 통찰로 후대의 과학자들이 세포에 주목해 많은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게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인류의 수명 연장과 함께 차츰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던 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암이 악성 종양 또는 악성 신생물(新生物)로도 불리는데요. 우리 몸속의 건강한 세포는 기능과 수명을 다하면 스스로 사멸하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일부 비정상적인 불량세포는 이런 생성과 소멸의 조화로운 균형을 거부합니다. 때가 돼도 죽지 않고 끊임없이 증식하면서 암 덩어리를 이루고 주위의 정상세포를 밀어내는 것이지요. 또 신생혈관을 만들어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혈액을 따라 멀리 이동하면서 이제 다른 장기에서도 새로운 암 덩어리를 만듭니다.

따라서 암은 손톱, 머리카락, 각막처럼 혈관이 분포하지 않는 죽은 세포를 제외하면 피부부터 혈액까지 우리 몸 어디서나 발병할 수 있습니다.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세포로 이뤄진 동물과 식물 대부분에서도 종양이 발생하지요. 야생동물의 경우에는 대부분 수명이 짧아 암에 걸리기 전에 죽고 설령 암을 앓는다 해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명이 긴 동물원의 사육동물과 가정의 반려동물들에게서는 사람처럼 암을 앓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암은 복잡한 기관의 고등동물뿐만 아니라 극도로 단순한 생명체인 히드라와 그 친척들인 해파리, 산호에게서도 발생합니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암세포들 역시 동물의 악성종양처럼 전이를 거듭한다고 하는데요. 혈관 조직이 없으니 대신 인접 조직으로 파고드는 방식으로 증식한다고 합니다.

 

억눌린 자의 분노?

이처럼 동물 대부분에서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으로 발생하는 암은 어쩌면 약 25억 년~5억 년 전으로 추정되는 다세포 생명의 기원과도 궤를 함께하는지 모릅니다. 독일의 생물학자 테오도어 보베리는 동물 발생과정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1914년 ‘악성종양의 기원’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단세포생물에서 다세포생물이 나왔기 때문에 세포에는 여전히 단세포성이라는 고대의 표현형이 잠복돼 있다가 특정한 이유로 다시 발현되면서 암이 된다는 가설입니다.

이는 곧 복잡한 체제로 진화한 생명체의 유지를 위해 단세포들이 저항 없이 스스로 사멸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다세포성을 갖게 되었는데, 어떤 이벤트를 계기로 아주 오래 전 조상 때부터 간직해온 독립성과 야생성을 다시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가설은 100여 년 만인 2017년 이를 증명하는 논문이 미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리며 또 다른 암 이해와 치료법 탐색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정상세포가 비정상세포로 변질되고 증식되는 게 암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무엇 때문에 발생하고 또 어떻게 세를 불리며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의 연구와 노력 덕분에 조금씩 그 베일을 벗으며 선제적인 예방과 성공적인 치료의 가능성 역시 따라서 높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