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나르샤
* 나르샤는 ‘날아오르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제3의 전쟁 ‘감염병’
20세기에 발발한 두 차례 세계대전은 5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재앙은 따로 있었습니다.
스페인독감, 간염, 에이즈 등의 감염병은 그 두 배인 1억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지요.
더욱 촘촘해지고 있는 하늘길과 바닷길, 국제화된 비즈니스 네트워크,
그리고 점점 더 악화되는 기후변화의 영향 속에 오늘날 감염병은
더욱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진화 중입니다.
시시각각 심화되는 21세기 감염병과의 싸움,
대한민국의 최전선에는 한국화학연구원이 있습니다.
감염병 방어 최전선에 서다
세계 제1의 부호로 불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는
지난 2015년부터 감염병을 막기 위한 국제활동에 막대한 사재를 쏟아 붓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더 이상 전쟁이나 미사일이 아니라 감염병”이라 경고하며
세계대전에 준하는 국제협력과 공동대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요.
감염병 대응의 처음과 끝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감염병과의 전쟁’으로 묘사합니다. 흑사병, 천연두, 결핵, 간염, 홍역, 에이즈, 에볼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메르스, 지카 그리고 국내에서만 연간 4천여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내고 있는 슈퍼박테리아까지 인류는 끊임없는 감염병의 위협 속에 살아왔습니다. 코로나19로 지구촌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터키, 인도 등지에서는 웨스트나일, 니파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며 또 다른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지요. 오랜 기간 전세계적인 감염병 출현과 진화 양상을 추적해온 미국의 과학전문기자 소니아 샤는 <팬데믹: 바이러스의 위협>이란 책에서 지난 50년 간 모두 300종 이상의 감염병이 예전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장소와 집단에서 새롭게 출현하거나 재출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렇게 하나를 막으면 또 다른 곳에서 풍선처럼 튀어나오며 쉴 새 없이 인류를 공격하고 있는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연구와 선제적인 대응 시스템 개발이 필요합니다. 특히 화학연이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 중 최초로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 개발에 성공해 주목을 받았는데요, 이 백신 후보물질은 백신 효능 중 하나인 중화항체 생성률이 다른 백신 후보물질들보다 최대 5배 높고 안전성도 뛰어나며 변이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벨기에로 떠난 초기 연구진
화학연의 연구 성과는 백신뿐만 아니라 진단과 치료제 분야에서도 계속해서 줄을 이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질병관리청으로부터 넘겨받은 바이러스 분리주를 이용해 실시간 유전자 증폭 기반의 분자진단키트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또 화학연 내 한국화합물은행이 보유한 약 20만 개의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스크리닝한 끝에 기존 치료제인 렘데시비르보다 약효가 더 뛰어나고 메르스, 사스에도 효과가 있는 치료제 후보물질을 도출한 것입니다. 이처럼 화학연이 진단·예방·치료 전 분야에 걸쳐 신속하고 의미 있는 성과들을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깊은 역사가 있습니다. 감염병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고 유행할지 쉽게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이고 심도 깊은 연구개발이 선행되어야만 갑작스런 출현에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데요. 화학연은 이미 1980년대부터 감염병 문제에 주목하며 한 발 앞서 대응역량과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염병은 연구 자체도 어렵지만 시설도 매우 중요합니다. 감염병 실험시설은 특히 연구자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는 만큼 구축 과정과 절차 모두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는데요. 초기에는 약초 같은 천연재료에서 항바이러스 물질을 분리해 입술 주위 물집이 잡히는 허피스 바이러스의 치료제 정도를 개발하던 단순한 수준이었는데도 실험실 주변으로 발길이 뚝 끊길 만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995년 본격적인 에이즈 치료제 개발을 위해 병원성 세균과 바이러스를 연구할 수 있는 BSL(Biosafety level) 실험실을 설치할 때는 같은 건물 사용자들 사이에 찬반투표까지 진행됐지요.
감염병 연구 역량의 강화
감염병 연구의 어려움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자본과 시설이 있다 해도 누구나 연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취급이 어려운 감염병 연구는 국제사회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사라진 천연두 바이러스 연구는 오직 미국과 러시아에서만 가능합니다. 짧은 시간에 세계의 축산업 기반을 통째로 흔들 수 있는 구제역은 미국 정부 소속의 외딴 섬에서 외부와 완벽히 격리된 채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외부 노출의 위험 때문에 일부 국가 외에는 바이러스 분양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갖은 난관 속에서도 20여 종의 감염병으로 차근차근 연구범위를 넓혀간 화학연의 연구 역량은 2006년 세계적인 글로벌 제약사 길리아드와 에이즈 치료제 후보물질을 공동개발하는 수준까지 빠르게 성장합니다. 이어 2014년에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중 최초로 BSL3 연구시설 인증을 받으며 저위험성 세균부터 고위험성 바이러스까지 100여 종 이상의 감염병들로 연구개발의 대상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지요. BSL3 연구시설은 인체감염 가능성이 높은 병원체를 다루는 실험으로부터 연구자와 주변 환경을 완벽히 보호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따라서 실험실을 이용하게 될 연구자의 동선부터 크고 작은 장비 하나하나까지 치밀한 설계와 꼼꼼한 건설과정이 필요합니다. 또한 완공 후에는 전염병예방법, LMO법, 동물보호법, 폐기물관리법, 원자력법에 이르는 매우 엄격한 규제의 대상으로 24시간 전문 관리자가 상주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 역량과 인프라를 갖추게 되면서 화학연은 이제 자체 연구개발 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계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16년에는 화학연 주관으로 국내의 신·변종 바이러스 대응 연구를 진두지휘하는 CEVI 융합연구단도 출범했지요. 그리고 그간 기업들이 해외 연구소에 의뢰해야 했던 각종 시험평가와 약효검사가 국내에서도 가능해지게 됐습니다. 현재 화학연은 의약바이오연구본부와 CEVI융합연구단에서 대한민국 감염병 방어의 최전선으로서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