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스페셜
이차전지 2라운드,
한국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최근 수 년 간 급성장을 거듭해온 글로벌 이차전지 산업계가
제2의 지각변동을 앞두고 숨고르기가 한창입니다.
세계 최대 전기차 생산국인 중국을 견제하려는 각국의 움직임이 핵심부품인
이차전지 관련 정책의 대대적인 변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계 교란종의 등장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2023년 중국의 자동차 산업은 다시 한번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생산량과 판매량 모두에서 역대 최대인 3천 만 대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500만 대 이상을 해외로 수출하며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수출국에 등극한 것입니다. 중국 자동차의 굴기(屈起)를 주도하는 것은 기존의 가격 경쟁력에 더해 이제 품질과 상품성까지 확보하고 있는 전기차입니다. 2020년대 들어 본격화된 중국산 전기차 수출로 현재 전 세계에서 굴러다니는 전기차 10대 중 6대가 중국 브랜드를 달고 있습니다. 국내만 해도 이미 전기버스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입니다.
서울 은수교통 종로12번 운행차량(BYD eBus-7) (사진=나무위키)
중국은 지난 2009년부터 약 30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며 전기차 산업을 육성해왔습니다. 이런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세계 최대의 내수시장을 등에 업은 BYD, 지리, 상하이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 마침내 아시아, 유럽, 미국 등으로 세를 넓히며 글로벌 전기차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초강력 태풍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2023 상반기 세계전기차 시장 점유율 그래프 (자료=SNE리서치)
이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 그린수소입니다. 하지만 전기분해 장치나 재생에너지의 전력 생산 비용으로 인한 경제성 확보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기술적 난제가 많지요. 이에 따라 전 세계 수소 생산량의 90% 이상은 여전히 화석연료 기반의 그레이수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 항공산업에 맞먹는 약 9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있습니다.
중국산 전기차의 급격한 영향력 확장은 세계 각국의 자동차 산업 정책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유럽의 보조금 제도 등 세계 각국의 연이은 산업 보호 조치는 결국 중국산 전기차의 범람을 막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열쇠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이차전지’입니다. 전기차 기술과 가격구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차전지 산업의 자체 역량 강화로 중국산 전기차의 대공세를 저지하려는 것입니다.
미국은 IRA를 통해 이차전지 부품의 일정 비율을 북미에서 생산하는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에만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유럽연합(EU)도 핵심원자재법(CRMA)을 만들어 자국 내 전기차 생산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최근 중국산 이차전지를 탑재한 전기차의 구매 보조금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조처들이 세계경기 둔화로 전기차 할인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넘사벽’ 가격공세 앞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중국은 핵심광물 확보에서 소재개발, 효율적인 생산공정까지 이미 독자적으로 구축한 수직계열화 생태계를 통해 이차전지 산업 전주기에 걸쳐 규모의 경제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국내 이차전지 기업들이 높은 기술 경쟁력을 지켜온 니켈·코발트·망간(NCM) 등의 삼원계 이차전지 대신 30% 이상 저렴한 중국산 리튬·인산철(LFP) 이차전지를 채택하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향후 반도체 이상의 수출주력산업이 될 것이라 전망되어 온 한국산 이차전지는 연평균 20% 이상의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 점유율 면에서는 값싼 중국산에 밀려 계속해서 순위가 낮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계속되는 점유율 하락
심각성을 인지한 우리 정부 역시 기술적 우위는 물론 시장의 트렌드 변화에 맞춰 새로운 이차전지 연구개발 전략 마련에 많은 힘을 쏟고 있는데요. 지난해 12월 비상경제장관회의를 통해 발표한 ‘이차전지 전주기 산업경쟁력 강화방안’이 대표적입니다. 이 강화 방안은 올해부터 2028년까지 이차전지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이뤄질 38조 원 이상의 대대적인 정책금융 지원 방향을 담고 있습니다. 이차전지 핵심광물의 공급망 안정과 미국 IRA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 기업들의 북미 시설투자 지원이 주요 골자를 이루고 있지요.
이차전지 전주기 산업경쟁력 강화방안 (자료=기획재정부 '23.12 발표자료)
양극재와 음극재 등 우리나라가 주도해 온 핵심소재 기술의 경쟁력을 더욱 고도화뿐만 아니라 함께 보다 높은 용량과 안전성의 차세대 이차전지 개발 프로젝트인 ‘글로벌 TOP 전략연구단’의 출범도 예고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력산업 발전을 견인해온 정부출연연구소들이 그간의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연구 경향을 넘어 다시 한 번 공동의 목표 아래 대규모 협력 연구로 어려움에 처한 국내 산업계에 새로운 기술혁신의 돌파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하고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출연연을 중심으로 구성될 전략연구단에는 약 1천억 원의 예산과 함께 그간 과학기술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자율적인 연구 몰입 환경도 확실히 보장하겠다는 게 정부의 복안인데요.
정부와 산업계 모두가 염원하는 ‘초격차 이차전지 기술’의 꿈은 화학연이 지난 40여 년 간 주력해 온 연구개발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화학연은 이미 1980년대부터 40년 넘게 이차전지 관련 연구개발에 주력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립 초기 합성 소재를 이용한 광소자와 전자소자 등으로 소재 개발 영역을 확대하던 중 이차전지 산업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2011년 관련 연구조직을 개편해 차세대 이차전지에 대한 연구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지요. 그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이차전지인 전고체 이차전지를 비롯해 또 다른 다크호스인 리튬황 이차전지와 리튬공기 이차전지에 대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초격차 기술을 향해
‘전고체 이차전지’는 전기차 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액체 전해질 대신 고체를 이용하는 리튬이온 이차전지입니다.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이온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고체로 만들어 단락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크게 낮추는 것입니다. 또한 전고체 이차전지는 5~10분 정도로 충전 시간이 매우 짧고, 한 번 충전으로 확보할 수 있는 주행거리도 리튬이온 이차전지보다 훨씬 긴 것으로 알려져 중국의 저가 이차전지 공세를 이겨낼 가장 유력한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화학연은 그간 고분자 내에 리튬 전해질염이 녹아 액체 전해질이 없이도 높은 이온 전도를 가지는 전고상 고체고분자 전해질(Intrinsic Solid Polymer Electrolyte)과 자유변형 전고체 리튬 고분자 전지 개발 등 전고체 이차전지 분야에서 빠르게 기술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특히 화학연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이차전지는 기존에 알려진 전고체 이차전지용 고체전해질보다 뛰어난 이온전도도, 유연성의 고분자 고체전해질과 우수한 복합전극 기술이 적용되며 전고체 이차전지 고유의 강점인 에너지밀도와 안전성을 한층 더 향상시킨 것입니다. 이 같은 노력 속에 2022년에는 국내 소재기업에 전고체 이차전지의 핵심기술을 이전하며 갈 길 바쁜 국내 전고체 이차전지 연구개발에 한층 속도를 더하게 됐습니다.
화학연 강영구·석정돈·김동욱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전고체 전지
화학연의 또 다른 주요 연구 분야인 ‘리튬황 이차전지’는 황(S)을 양극재로 사용합니다. 황은 부존자원도 풍부한 데다 정유와 철강 산업의 부산물로도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차전지의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습니다. 또한 에너지밀도가 이론적으로 리튬이온 이차전지보다 최소 2배에서 최대 10배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상용화에 성공할 경우 전기차 이차전지 시장의 신흥 강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따라 화학연은 황 전극의 전기화학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탄소나노튜브, 그래핀과 같은 전도성 소재와 복합체를 제조하여 용량뿐만 아니라 수명특성까지 늘리는 연구 성과를 낳고 있습니다.
‘리튬공기 이차전지’는 공기 중의 산소를 이차전지의 양극재로 사용하는 초경량 전지입니다. 산소의 산화·환원 반응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기존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10배 이상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의 차세대 이차전지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화학연은 리튬공기 이차전지 방전반응에서 산소 소모량과 충전반응의 반응 생성가스를 실시간 평가할 수 있는 in-situ DEMS(differential electrochemical mass spectrometer) 장비를 국내 최초로 설치해 리튬공기 이차전지의 핵심인 전극 및 전해질 소재 개발에 활용하는 한편, 리튬공기 이차전지 실시간 분석기술을 국내 주요 자동차 제조사에 성공적으로 이전했습니다.
생태계 질서의 수호자
이와 함께 화학연은 이차전지의 핵심소재인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질의 소재기술 혁신을 위한 연구도 병행해왔습니다. 가벼우면서도 전도성이 우수한 그래핀, 전기 전도도 문제를 해결한 3차원 다공성 실리콘 구조체 등 고용량의 음극소재 연구를 통해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더 소형화하면서도 더 오래, 더 빠르게 사용하고 충전할 수 있는 새로운 전극 소재 개발에 집중해왔지요. 기존의 흑연 대신 리튬금속을 음극재로 사용해 동일한 크기의 리튬이온 이차전지보다 높은 에너지밀도를 구현할 수 있는 리튬금속 이차전지도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이 같은 노력 속에 그래핀 전극을 이용한 12000mAh/g의 고용량 리튬공기 이차전지 기술, 진공 여과법을 이용해 제조하는 종이 형태의 그래핀 전극소재 제조 기술, 저렴한 카본블랙계 탄소의 전기화학적 특성을 향상시켜 충전 과전압을 낮추고 분해반응을 억제하는 기술, 전기방사법을 이용한 나토탄소섬유 전극 제조 기술, 마이크로파를 이용하는 금속 산화물 양극 소재 합성에서 시트르산을 첨가해 계층구조를 갖게 한 리튬인산철 양극소재 등 차세대 이차전지의 핵심기술 전반에서 고른 성과를 양산해오고 있는데요.
유럽 자동차 조사업체 제이토다이내믹스(JATO Dynamics)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구매를 고려하지 않았던 중국 전기차의 브랜드 파워는 이제 저가시장뿐만 아니라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며 “정책만으로는 전기차와 이차전지의 경제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결국은 연구개발에 힘을 쓰는 것이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가장 좋은 대비책”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주요 경영이론 중 하나인 ‘메기 효과(catfish effect)'는 기업 혹은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늘 적절한 위협과 자극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메기 같은 강한 천적에 대항하며 물고기들이 더 민첩하고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 이차전지 지형 전반에 큰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 이차전지 산업 역시 수족관을 휘젓는 메기라 할 만한데요. 중국의 압도적인 물량공세, 그리고 이를 피해 살아남으려는 세계 각국의 혼돈 속에서 이차전지 기술의 선도자인 한국과 그를 견인해온 화학연이 다시 한 번 생태계 질서를 바로 잡는 혁신의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