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스페셜 1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소산업 전시회 ‘H2 MEET 2023’이 지난 9월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최됐습니다. 수소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최신 기술이 총망라되는 이 행사에는 올해 역대 최대인 18개국 303개 기업·기관이 참가했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탄소중립 의무 시한과 산업 지형 변화에 대응해 수소에너지 활성화에 더욱 큰 힘을 쏟고 있는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2019년 대대적으로 발표된 우리나라의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계기로 열리기 시작한 H2 MEET는 궁극의 친환경 에너지 기술인 수전해와 수소연료전지 기술을 필두로 모빌리티, 충전소, 탱크, 파이프라인, 안전 등 전 세계 수소 기술의 발전상을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이 되어왔습니다.
세계 최초의 수소연료전지 승용차 양산과 수소법 제정 등으로 한 발 앞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확보해온 우리나라는 이번 H2 MEET 2023에서도 다양한 신기술들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는데요. 세계 최초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운행이 시작된 수소 청소차와 역시 세계 최초로 건설되는 울산 도시철도 1호선의 수소 트램을 비롯해 지게차부터 항공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발전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듈형 수소연료전지, 트럭에 싣고 다니는 이동형 수소충전 시스템, 음식물 쓰레기와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수소 추출 기술 등이 곧 다가올 수소사회의 미래를 가늠하게 했습니다.
수소는 현재 탄소중립 실현의 가장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에너지원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수소는 물과 유기화합물의 형태로 자연 어디에나 존재해 이론적인 생산량이 무제한에 가깝습니다. 143kJ/g의 단위 무게 당 연소열은 메탄, 휘발유보다 2~3배 높습니다. 연소 후에는 순수한 물만 남고 오염물질도 배출되지 않습니다. 대표적 에너지 운반체인 전기와 양방향 전환도 가능합니다. 18세기부터 계속돼온 연구와 응용으로 이미 상당한 지식과 기술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도 수소를 가장 유력한 차세대 범용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게 하는 강점입니다. 이에 따라 기술패권을 선점하려는 세계 각국의 각축전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데요.
미국은 2002년 가장 먼저 수소경제를 차세대 국가 에너지 정책으로 공식화하고 신재생에너지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는 캘리포니아 주를 중심으로 수소 관련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왔습니다. 이 같은 정책은 2020년을 전후해 다른 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데요. 특히 승용 위주의 무공해차량(ZEV) 규제를 트럭과 버스, 지게차 등의 상용차로 확대해 수소연료전지 기반의 모빌리티 시스템 구축에 주력하는 추세입니다. 넓은 국토에서 자연적으로 생성, 축적되는 수소 매장지를 개발하는 데도 관심이 높습니다. 최근 빌 게이츠가 지하 청정수소 추출 기술 개발에 9,100만 달러를 투자한 데 이어 미국 에너지부(DOE) 역시 대형 R&D 기금 조성을 발표했습니다.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등 중서부 주에서는 이미 시험정의 시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전통의 과학기술 강국 독일과 일본도 분주합니다. 두 나라가 2019~2020년 사이 공개한 수소에너지 정책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전략적인 위치 선정입니다. 이들의 비전은 ‘수소기술 수출국 지위 선점’과 ‘저비용 수소공급망 구축’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수소 생산-저장·운송-활용 전반에서 고부가가치 기술을 수출하고, 자국에 필요한 수소는 청정수소를 저렴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지역에서 수입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지요. 대규모 태양광 발전이 가능한 호주, 세계에서 가장 긴 해안선으로 풍력 발전 환경이 우수한 칠레, 천혜의 지열·수력 에너지를 보유한 아이슬란드처럼 그린수소 수출국 전환을 꾀하는 지역들과도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지는 전략입니다.
국경을 넘어 범지구적인 분업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수소 밸류체인은 재생에너지 환경이 빈약한 우리나라에게 불리한 조건인 동시에 유리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리더십 경쟁의 최종 승부처는 결국 ‘누가 더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수소기술을 개발·공급하게 될 것인가’로 귀결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석연료나 천연자원이 부족해도 이제 지식과 기술만 있다면 얼마든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공정하고 평등한 출발선이 열린 셈이지요.
이에 따라 화학연은 대한민국의 차세대 에너지 경쟁력 확보와 탄소중립 실현의 지렛대가 될 수소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생산과 저장·운송, 활용으로 이어지는 수소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고르게 첨단 기술을 양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 상태의 수소는 대부분 기체가 아닌 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처럼 비교적 손쉽게 캐거나 뽑아 쓸 수 있는 자원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인 분리 과정이 필요하지요. 현재 수소 생산 방식은 크게 3가지입니다. 석유화학·철강 산업 등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부생수소, 메탄 등의 탄화수소를 고온의 수증기로 열분해하는 추출수소, 그리고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와 산소를 분리하는 ‘수전해(水電解) 방식’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친환경적이고 이상적인 모델은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 수전해 방식입니다. 현재 글로벌 수소 생산량의 99%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생산되며 대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 수소 에너지 시대의 관건은 탄소배출제로의 청정수소를 생산하는 수전해 기술과 이를 활용할 수소연료전지 시스템의 고도화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올해 2월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학술단체인 미국화학회의 국제학술지(ACS Energy Letters)는 화학연 연구진이 개발한 ‘가지사슬 구조의 전해질막’을 표지 논문으로 선정했습니다. 바로 수전해 기술의 핵심소재인 전해질막의 성능을 기존보다 80% 넘게 향상시킨 연구 성과였는데요. 이 기술은 특히 흐린 날씨나 바람이 적은 날처럼 태양광·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떨어질 경우 수소-산소의 과도한 혼입으로 높아질 수 있는 폭발의 위험도 크게 줄였습니다. 튼튼한 엔지니어링 고분자 기반의 가지사슬 구조로 수소 이온의 ‘높은 전도도’와 수소 기체의 ‘낮은 투과율’이라는 수전해 시스템의 양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쾌거였지요.
이어 두 달 뒤인 4월에도 다시 한 번 화학연의 연구 성과가 미국화학회 국제학술지를 통해 세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화학연 연구진이 세계 최고 성능과 내구성의 전기화학적 이산화탄소 전환용 음이온교환막 소재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인데요. 화학연이 개발해온 이 소재 기술은 이산화탄소를 유용한 화학 원료인 일산화탄소(CO)로 전환하는 공정뿐만 아니라 친환경 수전해의 핵심기술로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전환 그리고 친환경 수전해라는 탄소중립 시대의 양대 핵심산업이 하나의 뿌리기술에서 양 갈래로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는 것인데요. 화학연의 관련 기술을 이전받은 한화솔루션은 국내 최초의 친환경 수전해 상용생산을 목표로 친환경 수전해 생산기지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화학연은 앞서 2020년에도 상용소재 대비 5~10배 높은 이온 선택 특성, 10분의 1 이하의 저렴한 합성 공정, 단량체 구조 및 특성과 합성 디자인의 다각화로 다양한 맞춤형 설계가 가능한 수소연료전지용 ‘비과불화탄소계 이오노머’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바 있습니다. 10년여의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큰 결실을 맺은 이 기술은 다시 세계 최초의 레독스 흐름전지용 부분가지형 이온 교환막 개발과 기술이전, 롤투롤 인쇄 공정을 기반으로 하는 대면적 연속식 이오노머 제조기술로 진화하며 한층 상용화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는데요.
화학연의 이런 성과들은 한 발 앞선 전망을 바탕으로 지속해온 중장기적인 연구개발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관련 기술의 성숙도가 매주 낮았던 1990년대부터 수소 생산과 저장·운송과 활용까지, 수소산업의 핵심기술 전반에 걸쳐 꾸준히 관련 연구개발을 이어온 노력이 본격적인 수소 에너지 시대를 맞아 비로소 활짝 만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학연은 이미 2018년에도 수소와 고부가화학제품을 동시에 생산하는 전기화학 촉매 전환 기술로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될 만큼 국내 수소 산업 경쟁력 강화에 오랜 기간 힘써 왔습니다. 이 기술은 대부분 버려지던 바이오디젤 생산과정의 부산물 글리세롤에서 수소와 유기산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촉매 기술인데요. 특히 기존 수전해 수소 생산 기술 대비 2배 이상의 적은 에너지로 수소 및 유기산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기화학 촉매 전환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현재 관련 기술 분야에서 화학연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지리적 여건상 저렴하고 안정적인 재생에너지 공급이 어려운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해 화력발전소나 원자로의 버려지는 폐열을 재활용하는 ‘메탄 열분해 기술’도 선보인 바 있습니다.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을 고온·고압의 증기로 분해하는 수소 생산방식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대폭 절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수전해에 버금가는 제2의 친환경 수소 생산 방식으로도 불릴 만한 이 기술은 화학공정의 효율을 높이고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는 ‘촉매’가 비결입니다. 화학연이 1976년 개원 이래 국내 화학산업의 발전을 위해 가장 공들여온 분야 중 하나이지요.
화학연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고성능 촉매 기술 개발은 오늘날 친환경 수소 생산의 영역에서도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고가의 백금을 10분의 1로 줄여도 높은 효율로 수소생성 반응을 유지하는 촉매, 역시 비싼 루테늄의 70분의 1 가격인 니켈을 활용해 값싸고 풍부한 암모니아로부터 저렴한 수소를 생산할 수 있게 한 촉매 기술들이 이런 화학연의 오랜 촉매 연구개발의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소 에너지 시대의 대두와 함께 빛을 발하는 화학연의 또 다른 연구개발 분야는 ‘불소’입니다. 화학연은 지난 30여 년간 제조과정이 어렵고 복잡해 독일·프랑스·일본·미국 등의 선진국에 의지해온 불소계 소재와 공정 기술 개발에 힘써왔습니다. 이에 따라 국내 유일의 불소계 소재 전문 연구그룹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 연속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될 만큼 앞장서서 불소계 소재 국산화의 길을 헤쳐 왔는데요.
2021년 화학연이 국내 기업에 이전한 ‘과불화술폰산 이오노머’는 현재 세계의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상용 수소차들에 탑재된 수소연료전지의 핵심 기술입니다. 우리나라가 수소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면서도 매우 까다롭고 긴 제조공정 때문에 해외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전량 수입해온 소재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는 압축이나 액화가 쉽지 않습니다. 점차 국제적으로 분업화되고 있는 글로벌 수소 밸류체인에서는 대용량의 수소를 먼 곳까지 쉽고 안전하게 저장·운송하는 기술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부피당 에너지 밀도가 현저히 낮은 수소 저장과 운송을 위해 매우 큰 부피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재 가장 대표적인 수소 저장·운송 기술로는 수소를 –253℃로 액화해 고압수소탱크로 옮기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지만 특수 설비가 필요하고 장기 보관도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원소 대부분과도 잘 화합하는 수소는 금속에도 잘 흡수되기 때문에 저장·운송 금속 용기의 취성을 높여 350 기압 이상의 압축 탱크에는 카본 소재의 특수재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 폭발 위험이 있는 700 기압 이상의 초고압과 극저온, 고가의 특수장치를 필요로 하는 용기를 대체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합니다. 수소를 제3의 안전한 화학물질과 결합시킨 뒤 다시 수소로 바꿔서 사용하는 액상유기물 수소 저장체(Liquid Organic Hydrogen Carrier, LOHC) 기술이 대표적이지요.
화학연이 국내 최초로 독일과 일본의 극소수 연구팀만 보유하고 있던 LOHC 핵심기술 개발에 도전하기 시작한 해는 2015년입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은 2018년, 헤테로 고리 기반의 독자적인 LOHC 유기물 소재와 선택적 수소화 촉매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국제적 권위지인 독일 ‘켐서스켐(Chem Sus Chem)’이 화학연의 연구 결과를 표지로 선정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용물질 활용을 넘어 고성능·고안정성의 LOHC 저장체와 촉매 제조 기술, 그리고 상용화의 필수 조건인 공정 기술 전체를 독자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만에 ‘액상유기물 기반 신규 수소 저장체 활용기술’이란 세계적 성과를 이뤄낸 화학연 연구진은 2019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서도 최우수성과로 선정된 이후, LOHC 기술의 상용화를 위한 대량생산 공정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국내 최대의 공업도시이자 수소 인프라 구축이 가장 활발한 울산시와 협력해 충전소와 모빌리티 등 수소 저장·운송 과정 전반에 대한 LOHC 기술 실증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미래 수소사회의 모습을 더욱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전망입니다.
수소 저장과 운반에 관한 또 다른 연구 중에 암모니아를 활용한 연구가 있습니다. 암모니아는 화학적으로 수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액체로 만들기 쉬워 이동과 보관이 편리합니다. 그런데 암모니아를 수소로 전환하려면 촉매가 필요하고 따라서 고효율과 저비용의 촉매 개발이 필수적입니다. 화학연에서는 세계 최고 성능 수준의 고효율 암모니아 분해 촉매 기술을 개발하여 에너지 환경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 중의 하나인 응용촉매 B-환경(Applied Catalysis B-Environmnetal)에 발표하였고 2022년 본 기술을 기업에 기술이전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 비귀금속 기반의 암모니아 분해 촉매 기술을 개발하는 데도 성공하여 응용촉매 B-환경(Applied Catalysis B-Environmnetal)에 게재하고 원천특허를 확보하였습니다. 화학연의 이러한 “암모니아로부터 고효율 수소 생산 촉매기술”은 우수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2023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에 선정되는 결과를 이뤄냈고 현재 상용화를 위한 실증 연구에 매진 중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0년 기준 연간 7천만 톤 수준인 전 세계 수소 생산량이 2070년 5.2억 톤까지 늘어나 최종 에너지 수요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을 넘어서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또한 전체 수소 생산량의 59%가 재생에너지 기반의 친환경 수전해 방식으로 이뤄져 누적 이산화탄소 감축량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지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전망치들을 종합해 바클레이, HSBC, 골드만삭스 등의 투자기관들이 예측하고 있는 2050년 세계 수소산업 시장의 규모는 무려 1조 달러에 이르고 있는데요.
친환경 수소 생산과 저장·운송, 활용 전반에 걸쳐 고르게 핵심기술들을 창출하며 국내 수소산업 생태계 모두의 경쟁력 향상에 힘쓰고 있는 화학연의 활약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 글로벌 수소경제 시대,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리더십 유지와 확보의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