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나르샤 I
* 나르샤는 ‘날아오르다’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빗장 잠그는 세계 발등의 불 ‘식량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극심한 기상이변, 코로나19 사태와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복합적인 여파로 전 세계 식량 공급망에 비상등이 켜졌습니다. 위기를 감지하고 주요작물과 비료 수출 제한에 나선 국가들이 빠르게 늘어나며 한국인의 밥상 물가도 고스란히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더 섬뜩한 것은 작금의 지구촌 식량위기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입니다. 식량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가, 일상화되고 있는 글로벌 식량위기 속에서 식량주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글로벌 식량위기의 현주소
인류는 그간 두 차례의 거대한 농업혁명을 통해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곡물 재배와 야생동물의 가축화에 성공하며 수렵·채집에서 농경사회로 이행하게 된 기원전 7000년경의 신석기혁명입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20세기 초의 녹색혁명을 통해 획기적인 식량증산이 이뤄지게 됩니다. 수천 년 간 이어져온 전통농법에서 벗어나 화학비료, 품종개량, 농약(제초제, 살충제, 살균제)등의 과학기술을 농업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지요.
세계 식량생태계의 불균형
덕분에 세계의 식량 생산량은 폭발적인 지구촌 인구 증가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꾸준히 증가해왔습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은 28억 톤, 전체 곡물 공급량은 35억 톤 규모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80억 명에 육박하고 있는 세계 인구 모두가 한 해 동안 매일 1kg씩을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2015년 열린 제70차 UN 총회는 지속가능한 지구의 발전을 위해 2030년까지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달성해야 할 17개 공동목표(UN-SDGs)를 채택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가 빈곤의 종식, 두 번째가 기아의 퇴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식량 공급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의 식량위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세기 후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자유무역은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산업적 발전과 경제적 풍요를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그늘도 컸습니다. 국가 간 격차의 심화로 가난한 나라들이 상대적으로 더욱 가난해지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지요. 식량 생산과 공급에서도 불균형이 심화됐습니다.
전통적으로 육류 소비가 많은 서구 국가들에 더해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도, 신흥공업국들의 높아지는 생활수준은 고스란히 고기와 유제품의 수요 폭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옥수수, 밀, 보리, 귀리 등 전 세계 곡물생산량의 절반은 축산물 소비를 위한 가축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기호식품 소비를 충족하기 위해 저개발국들은 주식 대신 수출작물의 경작지를 늘려왔습니다. 커피 원두의 세계적 공급지인 아프리카와 중남미, 각종 과일의 주산지인 동남아 국가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나라에서 부족해지는 식량자원은 다시 미국·러시아·캐나다·호주·프랑스 등의 선진 농업국가에서 대규모 영농으로 값싸게 생산된 농산물들이 차지하게 되었지요. 이 같은 불균형은 물, 토지, 에너지와 같은 식량생산자원 경쟁과 기후변화 등의 예상치 못한 악조건들 속에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식량자급 인프라가 망가지며 세계 곡물시장의 수급 변화에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지요. 2008년 미국·러시아의 극심한 가뭄으로 촉발된 세계 곡물 파동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몇 해 간 여파가 계속된 식량위기는 결국 ‘아랍의 봄’처럼 중동 지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폭동과 정권붕괴로 이어지게 됩니다.
높아지는 식량안보 위기감
올해 들어 전 세계 식량 가격은 57%나 치솟았습니다. 세계 3대 식량작물 중 하나인 밀은,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의 농업 기반이 전쟁으로 초토화되며 70% 이상 값이 치솟았습니다. 옥수수와 대두도 지난해 미국과 브라질의 큰 가뭄, 중국의 폭우와 인도·프랑스의 폭염으로 생산량이 크게 줄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기간의 코로나19 사태로 취약해진 글로벌 식량 공급망 역시 상황 악화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식량 수급 불안정에 대비하려는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 기조도 가뜩이나 높아진 식량 가격을 더욱 밀어 올리는 추가 상승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도가 자국 내 수급 우려로 밀 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자 밀 선물 가격이 급등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 각국이 단행한 수출제한조치는 올해에만 모두 57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품목이 비료를 비롯해 소맥, 대두유, 팜유, 옥수수 등의 주요 식량자원에 집중돼 있습니다.
2022년의 글로벌 식량위기는 이번에도 역시 세계 식량 생태계의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부터 엄습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와 식량농업기구(FAO)는 ‘급성 식량 불안정에 대한 조기경보’라는 제목의 공동보고서를 통해 “분쟁과 가뭄, 폭염, 홍수 등으로 인한 식량과 에너지 가격 급등이 수십 개 국가의 사람들을 극도의 굶주림과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며 위험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향후 몇 개월에서 최대 수 년 간 심각한 수준의 식량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나라들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페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중동과 중남미, 동남아 전역으로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 가난한 국가의 취약계층은 생계비 지출의 40% 이상을 식품비용이 차지하는 데다 육류와 채소, 과일보다 곡물 섭취량이 높아 요동치는 국제 곡물가격에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치솟는 물가의 고통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높아지는 외식 물가에 ‘런치플레이션’이란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허리띠를 죄고 있는 상황이지요. 하지만 아직은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식품과 외식 가격이 오를 뿐 밥을 굶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식량 위기는 가장 취약한 곳에서 시작해 결국 연쇄적으로 모든 곳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에는 가난한 나라의 빈곤가구 먼저 타격을 받지만 임계점을 넘어가면 전 세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세계 각국이 앞 다퉈 식량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격상시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안보도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7대 식량 수입국 중 하나입니다. 특히 밀과 옥수수 등의 주요 식품가공 자원은 거의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지요.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6%, 사료를 포함한 곡물자급률은 20% 수준으로 해마다 낮아지고 있습니다. 국내 농민들의 평균연령이 68세임을 감안하면 식량자급률 하향곡선은 더욱 가팔라질 게 분명합니다. 높아진 경제력으로 구매력이 충분해도 자칫 앞서 경험한 소재, 요소수,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위기처럼 충분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대안으로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식량 데이터 구축을 통해 위험 품목을 미리 파악하는 등 안정적인 해외 식량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 말합니다. 정부 역시 식량 주권 확보를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전문 생산단지와 전용 비축시설, 민간기업의 해외 곡물 공급망 확보를 추진 중입니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식량 낭비 저감 기술처럼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연구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신 농업기술, 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축산업을 대신해 단백질 등의 영양소를 공급해줄 대체식량 개발처럼 또 다른 농업혁명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료와 농약으로 녹색혁명을 견인해온 화학이 다시 한 번 큰 힘을 발휘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영역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