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아리아리
제철과 석유화학의 도원결의 “탄소중립, 융합으로 돌파한다”
소모되거나 변하지 않으면서 반응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물질. ‘촉매’의 사전적 정의입니다.
이 단어는 전문적인 화학 용어로서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식과 기술의 융합 촉진자라는 뜻으로도 언론 등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되곤 하는데요. 최근 화학연에 설립된 ‘LCP 융합연구단’만큼 이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도 찾기 힘들 듯합니다.
온실가스 배출 1, 2위의 만남
지난해 10월 화학연에서는 LCP 융합연구단(Center for Low-carbon Chemical Process, 저탄소화학공정융합연구단)의 현판식이 개최됐습니다. 박용기 연구단장과 이미혜 화학연 원장,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김종남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장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관계자 등 4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우리나라의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을 대표하는 포스코, LG화학, 롯데케미칼 등의 주요 인사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국내 석유화학·철강 분야의 산·학·연·관이 총출동하는 자리였는데요.
좀처럼 모이기 힘든 이들이 한날한시 화학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날 새롭게 출범하는 LCP 융합연구단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의미 때문입니다. LCP 융합연구단은 우리나라의 국가 탄소중립 대응을 위해 설립된 조직으로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이 확보한 원천기술을 모아 기업과 함께 실증하고 상용화까지 연계하는 협력 모델을 구축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산업분야 온실가스 배출 1, 2위를 다투는 철강산업과 정유·석유화학산업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을 받고 있지요.
가깝게는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중국·EU 등의 탄소세 도입, 조금 더 시간이 남았다 해도 2050년까지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제로에 가깝게 줄여야 하는 갈 길 바쁜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계로서는 LCP 융합연구단이 제시하는 온실가스 저감과 유용한 자원 생산의 일석이조 해결책을 크게 반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화력발전의 완전 중단과 함께 철강산업에서 95%,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73%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겠다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확정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 상용화 기술을 바탕으로
이 같은 도전적인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의 추진 배경에는 화학연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나프타 촉매 분해 공정 기술’ 같은 선도적인 에너지 저감 기술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원유 정제과정에서 생산되는 나프타는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중추를 이루는 아주 중요한 원료물질입니다.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의 다양한 기초유분이 만들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합성수지, 합성섬유, 염료, 의약품 등 광범위한 산업 제품들이 생산됩니다.
우리나라의 석유화학 산업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규모가 큰 만큼 나프타의 생산량과 사용량이 많고 수출 비중도 높습니다. 문제는 나프타 분해 공정에 약 850℃ 이상의 고온이 필요해 많은 에너지 소비와 함께 다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는 것인데요.
박용기 연구단장과 화학연 연구진들이 2002년부터 개발해온 세계 최초의 촉매 이용 나프타 분해 공정 기술은 기존 열분해 공정보다 150℃ 이상 낮은 온도에서 나프타를 분해할 수 있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이산화탄소 배출도 10% 이상 저감할 수 있습니다. 이 혁신 기술은 그간 계속되는 연구개발을 통해 상용 촉매 제조법 확보 및 데모 플랜트 평가에 이어 2010년대 화학연 사상 최대 규모의 기술이전으로 이어졌는데요.
국내 철강·화학 분야 연구기관과 기업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LCP 융합연구단이 화학연을 총괄기관으로 삼아 결집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오랜 연구개발 역량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탄소중립 시대의 신성장동력
현재 LCP 융합연구단이 추진하고 있는 가장 큰 연구개발 목표는 탄소 저감형 플라스틱 원료 제조 기술 개발과 통합공정의 실증입니다. 이산화탄소가 다량 포함된 잠재적 온실가스인 제철소 고로의 부생가스를 기반으로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인 올레핀을 생산하는 화학연의 원천기술을 포스코 등의 산업현장에서 직접 실증해 기업이 상용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검증하려는 것입니다.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정제 과정에서 생산해온 올레핀은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의 소재로 쓰이며 ‘석유화학산업의 쌀’로 불릴 만큼 산업과 일상 모두에서 중요한 원료입니다. 화학연의 원천기술이 상용화되면 기존의 플라스틱 원료 제조 기술인 나프타 열분해 기술 대비 약 15% 이상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며 올레핀을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제철소의 부생가스를 활용한 저에너지 기초화학 원료 제조 공정으로 감축이 가능한 온실가스는 연간 500억 노멀입방미터(Nm3)의 부생가스 사용량을 기준으로 약 57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생산비용도 10%가량 절감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요.
LCP 융합연구단은 현재 제철소 부생가스 기반의 메탄올 제조 기술, 천연가스로부터 합성가스를 생산하는 기술, 저활용 유분으로부터 올레핀을 제조하는 기술 등 철강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의 융합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심기술의 개발과 융합을 통해 연간 50만 톤의 플라스틱 원료를 생산하는 탄소 저감형 통합공정 기술을 완성한다는 계획을 향해 연구개발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습니다. 또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산업 생태계에 아직 이렇다 할 촉매 생산기업이 없음을 감안해 소재 국산화를 위한 촉매 생산기업의 설립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내 산업 분야 온실가스 배출량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철강과 석유화학산업의 융합형 탄소 저감 기술은 국가적 의무인 2050 탄소중립 실현의 가장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대책이자 또 다른 성장 동력으로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에 기반을 둔 미래 전망으로 한발 앞서 에너지 저감을 통한 온실가스 감축 기술의 상용화를 추진해온 화학연의 노력이 산업 간 융합을 넘어 대한민국에게 또 다른 성장의 돌파구를 제공하는 촉매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