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
화학연의 녹색정원
화학연에는 ‘화학’하면 연상되는 실험실 분위기와 사뭇 다른 독특한 공간이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각양각색의 연둣빛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대형 유리온실인데요. 바로 2023 KRICT 연구대상에 빛나는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센터장 최경자)의 주요 실험 공간입니다.
제조제, 살충제, 살균제 등의 작물보호제는 화학연이 1976년 설립 때부터 우리나라의 식량주권 확보를 위해 많은 공을 들여 연구해온 분야입니다. 당시 한국은 농촌 근대화의 열기 속에 해방 이후 처음으로 쌀을 자급할 만큼 농업혁명의 기운이 높았던 때입니다.
이 시기 화학연은 주로 해외 제품을 분석해 동일한 성능의 농약을 보다 경제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의 국내 산업계 보급에 힘썼는데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G7 프로젝트’에 농·의약이 포함되며 화학연의 신물질 연구개발은 중대한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에 진입시킨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추진된 초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은 화학연의 신물질 연구개발이 모방에서 혁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세계시장을 상대할 신물질 개발을 목표로 연구개발에 몰두한 화학연 연구진은 1995년 글로벌 농약기업 제네카에 유럽형 밀 제초제 특허기술을 이전한 이후 작물보호제 전반에 걸쳐 세계적인 신물질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화학연의 신물질 연구개발에서 특히 더 주목할 점은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가 실험실의 기초연구에서 벗어나 산·학·연 협력의 명실상부한 거점으로 기능했다는 것입니다. 신물질은 발굴에서 원제 등록까지 최소 10여 년의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연구개발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장의 트렌드와 수요기업의 요구 등에 대한 폭넓은 안목과 명확한 목표 수립이 중요합니다.
이에 따라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는 본연의 연구뿐만 아니라 기술을 이전받을 기업과의 지속적인 협력에 특히 많은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런 전통은 신물질의 성공적인 사업화와 함께 국내 기업이 세계 화학산업의 본진이자 농업대국인 미국, 유럽, 호주, 일본까지 공략하게 만드는 크나큰 동력이 됐습니다.
12조 세계시장의 다크호스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가 개발한 제초제 메타미포프(Metamifop)는 잡초에 대한 제초활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벼에 대한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신물질입니다. 기존 약제 사용량의 3분의 1만으로도 제초 효과가 뛰어난 데다 독성 또한 소금보다 안전한 수준까지 낮추며 2009년 지식경제부 10대 신기술에 선정되었는데요. (주)팜한농을 통해 제품화된 메타미포프는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 태국, 베트남을 거쳐 일본 진출까지 성공하며 기염을 토합니다.
메타미포프를 신호탄으로 세계시장 도전을 본격화한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는 한층 더 높은 목표를 잡았습니다. 제초제는 크게 살포된 지역의 모든 식물을 제거하는 ‘비선택성 제초제’와 작물 재배에 해가 되는 특정 식물만 방제하는 ‘선택성 제초제’로 나뉘는데요. 이 가운데 전 세계 비선택성 제초제 시장의 90%를 선진국 제품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저항성 잡초들에 대한 방제능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독제도 없어 ‘녹색악마’라 불린 제초제 그라목손처럼 강한 독성이 큰 문제였지요.
이에 따라 화학연은 메타미포프 개발로 함께 호흡을 맞춰온 (주)팜한농과 공동연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약 2,500여 종의 물질을 합성하고 테스트한 끝에 마침내 다시 한 번 혁신적인 제초제를 완성하게 되는데요. 이 신물질이 바로 지난해 전 세계 누계 매출액 1,000억 원을 넘긴 글로벌 히트 상품 ‘테라도’입니다. 테라도는 미국, 호주를 비롯해 세계 최대의 작물보호제 수요 국가인 브라질에서도 판매가 시작돼 향후 더 큰 시장 확대가 기대되고 있는데요.
2014년 화학연의 ‘세계일등 화학기술’에 선정되며 일찌감치 큰 주목을 받은 테라도는 28개국 이상의 특허등록에 이어 2020년 제초제 시장 최고의 무대인 미국 진출의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업계에서는 테라도의 미국환경보호청(EPA) 신규 작물보호제 등록이 바늘구멍보다 통과하기 어렵다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신규 의약품 승인에 비견될 정도의 기념비적인 성과라고 평가합니다.
테라도의 성능은 비선택성 제초제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선진국의 제품들을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진행된 90여 개 항목의 까다로운 안전성시험에서 사람과 동물, 환경 모두에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약효의 속도는 기존 제품들보다 최대 10배가 빨랐지요. 특히 나날이 늘어나는 저항성 잡초들에 대한 탁월한 제초효과는 기존 제초제들이 사용량만 늘고 효과는 떨어졌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만한 것이었습니다.
‘K-농업’의 혁신 교두보로
2023 KRICT 연구대상을 수상한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
농업 분야의 신물질 개발은 비단 화학뿐만 아니라 생물의 융합 연구가 필수적입니다.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에서는 합성 작물보호제뿐만 아니라 항생물질의 보고인 토양 방선균 등의 미생물과 곤충 등 천연물 기반의 바이오 작물보호제 후보물질을 발굴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한데요.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지원하는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의 중추기관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채소병리검정지원사업단은 국내 종자회사들이 병에 강한 채소종자를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병리검정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출범했는데요. 병리검정은 병원균에 대해 식물이 저항성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물이 특정 병원균에 대해 완전히 또는 자가치유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병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주요 연구대상은 가지과, 박과, 배추과 등의 채소작물. 듣기엔 간단하지만 가지, 토마토, 고추, 파프리카, 오이, 수박, 참외, 멜론, 호박, 무, 배추, 양배추, 브로콜리 등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지는 채소들 대부분이 모두 이 3개 과(科)에 포함됩니다.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는 그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던 국내 병리검정 체계를 바로 세우는 한편, 세계 각국의 치열한 종자전쟁 속에서 고군분투 중인 국내 중소 종자회사가 신품종 개발로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도 많은 기여를 하며 농림축산식품과학기술대상 국무총리상(2013)과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2014)에 연거푸 선정되었습니다.
2014년부터는 우리나라의 식량안보 위기 극복과 종자산업 발전을 위한 골든씨드 프로젝트(GSP)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병리검정 체계를 확립해오며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45종의 식물병에 대한 저항성을 검정할 수 있는 기관으로 성장을 거듭해 왔는데요.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 연구진들이 수상한 2023 KRICT 연구대상은 이 같은 오랜 연구개발과 협업 노력의 진가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이상기후, 연일 치솟는 에너지와 비료 가격 등으로 식량안보 위기가 상시화 되고 있는 만큼 친환경신물질연구센터의 활약은 앞으로 더 큰 기대를 모을 게 확실한데요. 대한민국의 녹색혁명을 견인해온 화학연의 혁신기술이 세계인 모두의 식탁을 건강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