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 다양한 화합물을 빠르게 합성할 수 있는 조합화학(Combinatorial chemistry) 기술이 발전해왔는데요. 이를 통해 얻어낸 대량의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고속으로 스크리닝 할 수 있는 HTS(High-Throughput Screening)도 함께 발전하며 지금까지 많은 신약개발에 기여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단점은 있었는데요. 수백만 종 이상의 화합물을 개별 합성·관리해야 한다는 점, 라이브러리 크기에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 구축에 5~10년이 걸린다는 점 등이 그것입니다.
DEL 기술이 대안으로 부상한 것은 1992년부터입니다. 미국의 의학연구소인 스크립스 연구소(TSRI)가 처음으로 제안한 DEL 기술은 기존의 라이브러리와 달리 암호화된 화합물을 혼합물의 형태로 보유하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되면 이론상으로 1년여의 기간 내에 수 조개 규모의 라이브러리를 구축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스크리닝에 소요되는 1년의 시간이 단 몇 시간으로, 비용도 10분의 1까지 극적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DEL 기술은 막강한 자금력과 연구 인력의 초거대 기업들이 아니면 자체적인 보유와 유지가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외를 망라한 대부분의 신약개발 기업들은 극소수 미국과 중국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고가에 이용하거나 공동연구 형태로 초기 선도물질 도출을 진행해왔는데요. 이 역시 어느 정도 규모가 큰 제약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일 뿐, 중소 벤처기업들로서는 최소 수 억 원의 비용이 필요한 DEL 기술의 활용은 언감생심 꿈꾸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앞서 화학연은 2000년 설립한 한국화합물은행을 통해 이미 20년 넘게 국내에서 생산되는 신약소재 화합물과 관련 연구 성과들을 수집해 통합관리하며 범국가적으로 공동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에 힘써왔습니다. 그리고 2023년, 높은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기반기술 부족과 라이브러리 부재, 높은 사용료 등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는 DEL 기술의 원스탑(One-stop) 공공서비스를 목표로 DEL기술연구단을 출범시키게 됐는데요.
DEL기술연구단 추진일정 및 기대효과 (자료 = DEL기술연구단)
연구단은 글로벌 수준의 DEL 기술 서비스를 통해 국내 제약사와 연구자들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목표 아래 현재 대용량 유전자 암호화 라이브러리 플랫폼 기반의 코어뱅크 구축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코어뱅크는 원래 금융기관에서 사용하는 핵심적인 전산 시스템으로 예금, 대출, 이체 등의 업무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말하는데요. DEL기술연구단이 구축 중인 코어뱅크 역시 정보제공부터 분석, 합성, 스크리닝과 약효평가, 수요맞춤형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DEL 기술 체계의 전반을 통합 관리하게 됩니다.
한 국가의 신약개발 경쟁력은 결국 누가 더 튼튼하고 정교한 기초 인프라를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거대 자본과 기술, 인력으로 독자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거대 다국적 기업이 없는 우리나라는 보다 많은 기업과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신약개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개방형 혁신 플랫폼 마련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인데요. 폐쇄적이었던 DEL 기술의 물꼬를 트기 위한 화학연의 노력이 독보적인 블록버스터 급 한국산 신약 탄생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