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CT 아리아리
* 아리아리는 ‘어려워도 함께 헤쳐가자’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새로운 리더십 경쟁의 승부처
수소 ‘생산·저장·사용’ 기술
무한청정의 에너지원인 수소가 화석연료의 대체재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입니다.
1920년 물의 전기분해 장치로 수소의 상업적 생산이 시작된 뒤
영국 과학자 샌더슨 홀데인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풍차로 전기를 만들어 물을 분해하고,
수소를 액화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보내, 연료전지를 이용해 다시 전기로 사용하자는 것이었지요.
현대의 친환경 수소 에너지 이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인 ‘친환경’과 ‘경제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 간단해 보이는 수소 에너지의 ‘생산-저장·운송-사용’ 과정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혁신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수소 딜레마 해결사 ‘촉매’
수소는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물과 수백 만 가지가 넘는 유기화합물의 형태로 어디에나 흔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량으로 수소를 얻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처럼 비교적 손쉽게 캐거나 뽑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추출해야 하는 자원입니다. 또한 생산된 수소를 저장·운송하고 사용하는 데도 많은 연료가 투입됩니다. 에너지를 만들어 쓰는 데 정작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역설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중 하나가 바로 마법의 돌로 불리는 ‘촉매’입니다. 촉매(Catalyst)는 화학반응을 활성화시켜 화학 공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여줍니다. 화학연은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촉매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요. 오랜 시간 화학연이 축적해온 촉매 연구의 지식과 경험은 2050 탄소중립의 열쇠로 부상 중인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수소기술 개발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소 생산 영역의 대표 성과로는 C1가스·탄소융합연구센터 김형주 박사팀의 연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대부분 버려지던 바이오디젤 생산과정의 부산물 글리세롤에서 수소와 유기산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촉매 설계 기술을 개발했는데요. 일반적으로 글리세롤로 수소와 유기산을 만드는 데는 고가의 귀금속인 백금이 촉매로 쓰입니다. 현재의 수소 에너지 시스템에서 백금 촉매가 차지하는 가격 비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응 속도가 빠르기 때문인데요. 문제는 매장량이 한정돼 있어 수요량이 늘어나는 만큼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가격구조입니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목표는 아주 명확합니다. 어떻게든 백금 사용량을 줄이거나 비슷한 성능의 대체 물질을 찾는 것이지요. 연구자들은 보통 백금 촉매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표면적을 넓히는 연구를 수행해왔습니다. 탄소지지체 위에 백금을 고르게 분산시켜 효율을 높이려는 것이었지요. 화학연 연구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3차원 구조의 탄소지지체를 만들어서 기존 탄소지지체보다 10배나 넓은 표면적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지지체에 고르게 분산된 백금 입자가 글리세롤과 더 잘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백금 사용량을 10배 이상 적게 사용해도 수소생성 반응에 고성능을 유지하는 새로운 전기화학 기반 촉매 합성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연구팀은 앞으로 이런 기술들을 활용한 대면적 전극 개발, 촉매대량 생산공정 개발 등 기술 상용화를 위한 연구에 더욱 노력을 기울일 예정입니다. 미래 수소 산업의 핵심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수소 생산, 이른바 ‘그린수소’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그린수소 생산 방식은 태양광, 풍력, 지열 등의 친환경 재생에너지로 물을 전기분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리적 여건상 저렴하고 안정적인 재생에너지 공급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로서는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제2, 제3의 친환경 수소생산 기술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기술이 바로 화력발전소와 원자로 등의 폐열로 메탄(CH4)을 분해하는 ‘메탄 열분해’ 방식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수소의 76%가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을 고온·고압의 증기로 분해하는 ‘스팀개질’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있지요. 열에너지로 메탄을 분해하는 메탄 열분해 방식은 전기에너지를 쓰는 수전해처럼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또 버려지는 폐열을 이용하면 경제성도 높아집니다. 하지만 열분해 과정에서 나온 탄소가 촉매에 달라붙어 기능을 상실시키는 촉매 비활성화 문제가 상용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C1가스·탄소융합연구센터 이윤조 박사팀은 해결책으로 니켈 촉매에 비스무스 용매를 섞는 ‘용융금속 촉매’를 제시했는데요. 밀도차에 따라 비중이 낮은 탄소가 용융금속 위로 떠오르면서 촉매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연구팀은 2024년 기술개발 완료와 산업계 기술이전을 목표로 공정 최적화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수소 사용의 기술적 동력들
탄소중립 시대, 친환경적으로 생산돼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저장·운송 수단을 거친 수소가 최종적으로 사용되는 소비처는 크고 작은 형태의 ‘수소연료전지’입니다. 수소연료전지는 그 자체가 작은 발전소입니다. 차량과 선박 같은 수송수단뿐만 아니라 도심과 산업단지처럼 필요한 곳에 설치해 소규모 발전소로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는 물 분해의 역반응을 통해 발생하는데 대기 중의 산소를 공급받아 수소와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미세먼지와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대형 공기청정기 역할도 합니다. 태양광, 풍력처럼 생산 시간이 고르지 않고 남으면 버려지는 재생에너지를 장시간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저장시스템(ESS) 기술로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소연료전지는 두 개의 전극(연료극, 공기극)과 그 사이의 전해질막으로 구성됩니다. 수소이온을 통과시켜 산소와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전해질막은 자동차의 엔진처럼 수소연료전지의 전체 성능을 좌우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수소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지만, 전해질막인 ‘과불화술폰산 이오노머’만큼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과불화술폰산 이오노머 제조 공정은 불소화학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기술입니다. 기초원료 제조와 중간물질 합성 및 정제, 최종소재 제조와 검증까지 모두 오랜 시간의 연구와 상용공정 수준 기술이 확보되어야만 제조가 가능하지요. 또한 높은 수준의 폭발 가능성을 제어해야 하며 공정이 매우 길고 까다로워 듀폰, 솔베이 등의 글로벌 기업들이 독점적으로 초고수익을 올리고 있던 기술이지요. 하지만 화학연 계면재료화학공정연구센터 박인준 박사팀이 기존 연구에서 확보한 기초원료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2018년 국내 최초로 과불화술폰산 이오노머 합성기술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마침내 9단계에 이르는 공정 기술 전체를 국내 기업에 이전하며 탄소중립 시대 국가전략산업으로 부상 중인 수소산업 발전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박인준 박사팀은 현재 새로운 전해질막을 장착한 고분자 연료전지의 장기 내구성 등 다양한 성능평가와 함께 2022년말 승용차 10만대 분에 해당하는 연간 100톤 규모의 상업생산을 목표로 생산공정 설계를 진행 중입니다. 화학연은 또한 수소와 화학산업의 필수기술인 ‘수소화 반응’에서도 새로운 저비용·고효율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수소화 반응은 액상수소와 반응물을 촉매에 함께 넣어 새로운 생성물을 얻는 화학반응입니다. 플라스틱·연료·섬유·고무·화장품·의약품 등의 중간체와 바이오매스를 합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기술이지요. 그간 수소화 반응은 일반적으로 100℃ 이상의 온도에서 이뤄졌습니다. 상온에서도 가능하려면 팔라듐과 백금 등 값비싼 귀금속 촉매가 필요해 경제성이 크게 떨어졌는데요. 그린탄소연구센터 황영규 박사팀은 금속유기골격체(MOF) 촉매에 알코올을 넣고 단순 가열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이런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소화 반응 중의 수소 전달 메커니즘도 새롭게 밝히며 화학과 수소산업의 핵심이 되고 있는 촉매 연구의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다가오는 수소사회는 화석연료 자원이 없었던 우리나라에 새로운 기회의 장이기도 합니다. 지식과 기술만으로 얼마든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공정하고 평등한 출발선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국 역시 탄소중립의 실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주도권 경쟁을 위해서도 수소 기술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요. 생산-저장·운송-사용의 수소기술 생태계 전반에 걸쳐 고르게 성과를 창출하고 있는 화학연의 활약이 수소문명 시대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 확보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