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칼럼
나날이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화학의 역할은?
글 |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생명의 근원이고, 문명의 핵심인 탄소가 기후 위기를 촉발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전락해버렸다. 산업현장과 일상생활에서 탄소를 완전히 퇴출해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탄소를 줄이자는 ‘저탄소’(Low carbon)와 탄소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탈탄소’(Carbon free)도 있었다. 이제는 탄소의 순(純)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탄소 중립’(Carbon neutral 또는 Net zero)이 대세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7월 첫째 주는 세계 기상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한 주로 기록됐다. 미국 국립환 경예측센터(NCEP)는 7월 3일과 4일에 이어 7일의 지구 평균 기온은 섭씨 17.23도였다고 밝혔다. 심지어 7월 4일이 지난 1만2,500년의 인류 역사에서 가장 더운 날이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급격한 지구 온난화와 함 께 극한적인 기상 이변도 잦아지고 있다.
?특히 이번 여름의 북반구가 그렇다. 기록적인 폭염, 폭우,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수도권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극한 호우’ 경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도를 넘은 탄소의 악마화
탄소에 대한 저주는 UN의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환경주의자와 기후학자가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실제로 탄소를 ‘악마’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탄소가 심각한 기후변화, 식량 생산 감소, 물 부족, 환경 파괴 등을 일으키는 지구 온난화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도 탄소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는 억지 주장도 있다.
서식지를 빼앗긴 박쥐가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보복하는 과정에 서 듣도 보도 못한 팬데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들먹이는 ‘탄소’는 현대 화학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번호 12번의 ‘탄소’(carbon)가 아니다. 오히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악당은 화석연료의 연소 과정에서 부산물로 대기 중에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말한다. ‘탄소’와 ‘이산화탄소’의 구분은 화학 자들에게나 필요하다는 것이 화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기 후학자와 환경주의자들의 억지다. 역시 지구의 대기를 뜨겁게 만드는 온실가스인 수증기·메탄(천연가스)·암모니아·오존·이산화질소의 영향은 애써 외면해버린다. 이산화탄소가 녹색 식물을 번성하도록 해준다는 사실도 무시한다.
지구 온난화가 인간의 과도한 화석연료 소비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경제·사회·정치·문화·보건의 문제가 탄소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떠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억지이고 괴담일 수밖에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환경 문제를 소홀히 여기고 화석연료를 마구 써버린 우리 자신의 실수를 엉뚱하게 멀쩡한 탄소의 탓으로 돌려버리려는 자세는 매우 비겁한 것이다.
지구온난화지수(GWP) Ⅰ 출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제 4차 평가 종합보고서
탄소가 우리의 무분별한 소비와 낭비를 부추긴 것도 아니다. 화석연료의 소비를 줄이고,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 이기만 하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지구의 대기는 화학적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복잡계이다. 그런 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비가역적(irreversible)·비선 형(nonlinear)일 수밖에 없다. 화석연료의 사용을 포기한다고 지구가 다시 식어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한 것일 뿐이다.
사실 우리에게 변화하는 기후를 되돌릴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대한 자연의 도도한 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기술만능주의적 인 환상일 수도 있다. 지난 400여 년 동안 이룩한 놀라운 과학 지식과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여전히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의 자연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여서 자연 생태계로부터의 ‘자립’(自立)을 꿈꿔야 한다. 자연의 변화에 현명하게 ‘적응(適應)’하기 위한 노력이 절박하게 필요하다. 탄소에 대한 공연한 악마화가 자칫 우리의 절박한 노력에 독(毒)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겸손한 인식이 필요하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인류의 지 속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탄소문화’(Carbon Culture)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막 중한 시대적 당위다. 특히 현대 과학과 기술의 가치와 성과를 분명하게 평가해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친(親)탄소적이고, 친(親)과학적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인간의 존재와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탄소를 현명하게 활용하는 ‘화학적’ 지혜가 절실하다.
힘겨운 무탄소 전원(電源)의 꿈
50만 년 전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삶을 살던 인간이 ‘불’이라는 화학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면서 찬란한 인류 문명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어둠과 추위를 극복하고, 맹수를 물리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불을 이용해서 음식을 조리하면서 뇌가 커지는 놀라운 기적도 일어났다. 발전은 더디게 진행됐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된 것은 고작 1만2000년 전의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은 화학 혁명이었다. 인류가 50만 년 동안 의존해왔던 장작·낙엽·숯·배설물과 같은 임산(林産) 연료를 대체하는 새로운 연료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지천으로 널려있었지만, 연소 과정에서 배출되는 맹독성의 일산화탄소 때문에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던 석탄을 안전하게 연소시키는 화학적 기술이 등장했다.
변화는 놀라웠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지구상의 인구가 8배나 늘었고, 에너지 소비도 30배나 증가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하게 석탄·석유·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를 안전하고, 효율적으 로 활용하는 화학적 기술을 개발한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나 지나치면 넘치는 법이다. 우리에게 풍요롭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화석연료가 오히려 환경을 망치고,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깨끗하고, 안전한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50만 년의 긴 역사를 가진 화석연료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일이 생각처럼 쉬울 수는 없다. 무한정의 햇빛과 깨끗한 바람으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간헐성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리튬 이온 배터리를 이용한 에너지저장장치 (ESS)가 분명한 해결책이 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화재의 위험을 극복하는 일도 쉽지 않고, 자동차 수준의 응용도 힘겨운 상황이다. 과연 휴대폰 수준에서나 유용한 리튬 이온 배터리를 국가적 규모의 송전망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수소와 암모니아를 비롯한 무탄소 에너지의 꿈도 만만치 않다. 수소가 우주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과학 적 진실이다. 그렇다고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수소 가 무한정의 에너지원이 되어줄 것이라는 공허한 선동은 의미가 없다. 수소의 폭발 위험과 연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질소 산화물의 위험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다. 독성이 강한 암모니아를 연료로 사용하려면 연소를 가속해주는 라디칼 연쇄반응이 꼭 필요하다.
‘용량(用量)이 독(毒)을 만든다’(The dose makes the poison)는 파라셀수스 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약과 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탄소가 아니다. 이산화탄소를 지나치게 많이 배출하고 있는 인간이 문제라는 분명한 인식이 꼭 필요하다. 탄소를 대체하는 원소를 찾는 대신 탄소를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활용하는 화학적 기술을 개발하는 노력이 훨씬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탄소를 포기하는 데도 고도의 화학적 기술이 필요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화학이 없는 세상에는 인류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